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화도 조약 (문단 편집) == 배경 == 1609년 [[기유약조]]를 맺은 이래로 조선과 일본은 각각 조선 국왕과 일본 [[쇼군]]을 우두머리로 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국서를 교환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쇼군이 즉위할 때마다 조선에서 [[조선통신사|대규모 사신단]]을 보내서 쇼군가의 [[신사(신토)|신사]]에 참배한다는 사실은 일본 내에서 쇼군의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행사였으며, 계속된 외침을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시켜야 했던 조선 입장에서도 쇼군을 잘 달래서 일본과의 군사 분쟁을 예방하는 것은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다. 그러나 1853년 [[페리 제독]]이 미국의 신식 전함을 끌고 와서 일본의 개항을 요구한 [[쿠로후네 사건]] 이후로 [[막부]] 체제는 계속 흔들려서, 1867년에 쇼군 스스로 막부 체제를 폐지한 [[대정봉환]]과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발 더 나간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출신 무사들이 일으킨 [[무진전쟁]]을 거치면서 막부 측 인사는 대부분 소멸하였고, 결국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하급 무사들 중심의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본은 관련 사실을 통지하는 서계(書契)를 쓰시마 번주를 통해 보낸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있던 당시 조선에서는 황(皇), 칙(勅)과 같이 외교 문서의 형식과 표현이 종전과 다른 점, 다른 인장을 사용한 점을 문제삼아 문서를 반환·거부한다. 쓰시마 번주는 일본 내에 정치적 변화를 설명하며 서계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나 조선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후 대조선 외교권을 신정부가 직접 관할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천황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세웠던 일본은 천황이라는 표현을 문제삼은 조선의 행동에 분개하였고, 해결책 중 하나로 [[정한론]]이 대두된다. 정한론은 '마치 20년 전에 서양 [[열강]]들이 일본에 했던 것처럼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점령하자'는 주장이었다.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던 많은 무사들이 정한론을 지지했고, 조선과의 통상을 원하던 일본의 무역상들도 정한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1873년 당시 메이지 정부의 유력 인사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과의 국교를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사절로 갈 것을 제안하였다. 자신이 사절로 가서 국교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면 이득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십중팔구 조선에서 죽임을 당할테니 개전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의 주요 각료들은 전쟁을 일으키기보단 내치에 집중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사이고의 조선 사절 파견을 겨우 막았다. 결국 정치 파벌 싸움에서 진 사이고와 정한론파들은 정부에서 사의하고 낙향한다 ([[메이지 6년 정변]]). 대신에 일본 정부는 1874년 [[대만]]에 소규모 원정을 보내서 정한론의 동력을 잠재웠다.[* 출정 자체는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한계와 [[말라리아]]에 의한 [[비전투손실]]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약간의 돈을 뜯어내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한편 조선에서도 대일 강경파였던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여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일본은 다시 조선과의 외교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으나 여전히 1875년 부산에서 열린 회담은 결렬되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이 일본과의 통상 협정을 극렬히 반대했으며,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결국 무력으로 밖에 외교를 재개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일본 내부의 강경파들은 외무경 이와쿠라 도모미,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등의 동의를 얻어[* 이와쿠라는 2년전의 정한론 논쟁에서 정한론을 반대했었고, 산조는 양쪽 파벌 사이에 끼어 있다가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누워 큰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250톤급 전투함인 [[운요호]]를 조선으로 보내어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과 외교 관계를 재개함과 동시에 조선 내에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통상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전에는 쓰시마 상인만이 조선에서 왜관에서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853년의 개항 이후 20년간 일본의 국력 신장은 (당시 유럽과 미국의 경제 성장률에 비해) 급격히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선과 일본의 기본적인 국력차가 상당했다. [[임진왜란]] 때에도 조선은 [[명나라]]의 원군이 없었다면 국가가 멸망할 뻔 했는데,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각종 변란을 겪으며 나라가 수차례 쑥대밭이 된 반면에, 일본은 오랜 평화 속에서 인구와 생산력을 꾸준히 성장시킨 상황이었다. 1870년 시점에서 일본의 총인구는 조선의 2배 정도였고, 추정 [[국내총생산|1인당 국민 총생산]]은 2.5배 가량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이루기 위한 내전 과정에서 서양의 앞선 무기와 함선을 수입하여 군대를 근대화시켰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1875년 시점에서도 이미 조선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 [[파일:r55lOyI.jpg|width=100%]] || |||| '''[[운요호 사건]] 일지''' || || 1 ||군함 운요호가 무단으로 조선의 [[부산]] 해역에 접근 (5월)|| || 2 ||함장 이노우에는 "일본과 조선 간의 상호 통상을 위해 방문했으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주장|| || 3 ||잠시 일본으로 귀환했던 운요호가 다시 서해안으로 항해하여 [[강화도]]에 이름|| || 4 ||일본군이 운요호에서 보트를 내려 강화도로 접근함 (9월 20일)|| || 5 ||조선군이 일본군을 발견하고 "물러가라"며 경고 사격|| || 6 ||경고 사격을 받은 일본군의 보트가 운요호로 돌아감|| || 7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여 함포를 발사하고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임(9월 21일)|| || 8 ||[[영종도]]에 상륙하여 근대식 대포와 무기로 조선 수군을 궤멸하고 현지 양민들을 학살·약탈하고 불을 지름(9월 22일)|| 1875년 5월 부산에 도착해 무력시위를 벌인 운요호는 9월에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9월 20일~22일의 3일간 운요호는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여서 35명의 조선군을 전사시켰다. 반면에 일본군의 피해는 2명이 사상을 당한 것에 그쳤을 정도로 양국 군대의 무장 수준 차이가 극심하였다. 이 사건은 만약 일본 전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양]]에 포격을 가하려고 하면 조선군이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었기에 조선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공사를 청국에 파견해 청 공사와 [[이홍장]]을 각각 만나,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에 맡긴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때 모리는 조선이 속국이 아니라는 답변을 얻고자 하였으나 결국 청국의 속국론을 인정하였다. 한편 청은 신정부에 '소속방토(所屬邦土)'인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아닌 이상 조선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향이 없음을 전달했다. 당시 청은 미얀마를 둘러싼 영국과의 마찰(1874년 마가리 사건, 1876년 체푸 조약),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마찰(1874년 사이공 조약, 1884년 [[청프전쟁]]), 러시아와의 전쟁 직전까지의 위기(1871년 ~ 1881년 [[이리#s-11|이리]] 분쟁)로 수많은 분쟁에 시달리고 있어 조선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굳이 일본과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하면 속방 조선이 일본에게 공격당할 것이 명약관화했으므로, 조선이 일본과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이에 1876년 1월 10일 이홍장이 영의정 이유원에게 일본과 조약을 맺도록 종용하는 서한을 보낸다. 일본은 청과의 교섭을 종료하고 1876년 1월 30일 [[쿠로다 키요타카]]를 전권 대사, [[이노우에 카오루]]를 부대신, 마야모토 고이치, 모리야마 시게루를 이사관으로 해 닛신(日進), 모슌(孟春), 제이정묘(第二丁卯) 3척의 군함으로 부산에 보낸다. 일본은 입항하며 기선 제압을 위해 무력 시위를 벌인다. 부산으로 시위 행진하며 예포를 쏜다는 구실로 대포를 쏘아댔고, 무장한 해병대 50명으로 공관 관문, 성문을 부수었다. 부산진 첨사 임백현이 왜관에 항의하나 관장은 책임을 회피했고, 군, 민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해병대의 발포, 총검 돌격으로 조선인 중, 경상자 12명이 발생했다. 일본은 부산에서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 다음 강화도로 곧바로 향하고, 모리야마 시게루를 시켜 예비 교섭을 하게 했다. 조선 정부는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을 접견 대관, 윤자승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